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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몸살

꽃 몸살 강우현 병점성당 벚나무 아래 응답받지 못한 기도만 서성이는 저녁 꽃들의 유혹 고봉이다 죄인처럼 고개 떨군 로만칼라는 무슨 방패로 막아내느라 게으른 일꾼처럼 걷나 신부와 사내가 싸우면 주먹 쥐고 대드는 놈은 어쩌나 이 봄날 흠씬 때리고도 심장이 서늘히 아플 짐승 부를 수 없는 이름 만삭일 텐데 바닥 환하도록 꽃바구니 몽땅 엎어야 끝나는 싸움 비버 이빨 같은 촉이 파랗게 돋아야 하는데 도진 꽃 몸살 이승의 갈림길 넘어가느라 우묵한 그늘 오달지게 까맣다 신과 사람이 한 끗 차이다

카테고리 없음 2023.03.07

오래된 봄

보이는 것들이 전부라고 믿는 오래된 자궁 전혀 그 깊이를 재 본 적 없는 뭔가 비밀이 있어 보이고 투명도 여러 겹으로 가리면 커튼이 되는지 안쪽부터 하나씩 젖히는 소리 짹짹짹 졸졸졸 호르르호르르 모른 척 지나는 게 많아지는 나이처럼 그렇게 흘러가는 게 두루두루 좋아서 굳은살 박이는 재미 같아서 엄마의 젖을 물고 이름표 하나씩 달고 오는 것들 호명 소리 귀 기울이다가 못 들어도 들은 척 눈 맞추고 싶은 신생 나는 얼마나 회개해야 저쪽에서 오는 소리 들을까 환생 같은 아닌 것 같은 걸음은 처음부터 죄 없는 족보를 가진 건가 다른 듯 새롭게 읽히는 저 늙은 아이는

카테고리 없음 2023.02.08

숫돌

내가 위아래로 움직일 때마다 앞 뒤 생각 없이 닳아가고 막무가내 떼를 써도 그러려니 껴안습니다 당신은 머리부터 발 끝까지 날카롭건 무디건 상관없이 비스듬한 비명마저 세우는 날에 베여가며 어둠의 숨소리처럼 깊어집니다 서로에게 가는 길은 깎고 깎이는 상처뿐 통증 감춘 오랜 감각만 허리가 꼿꼿합니다 밖으로 돌다 뭉툭해지면 돌아와 파고드는 품 또 하루 제 살 깎아낸 우묵한 외사랑이 저뭅니다

카테고리 없음 2023.01.28

아마도

지나간다는 말이 아프다 어제를 두고 온 오늘은 또 무엇을 두고 갈지 웃음 아니면 눈물 누군 꽃을 남기라고 누군 반짝이는 돌을 남기라고 탈색한 종이는 맡겨도 숨겨도 냄새가 난다고 갈피마다 출렁이는 시간을 앉히고 뻣뻣한 목을 문질러 사월이 망가지지 않게 정지된 흐름을 착각하는 걸음이 되지 않게 값없는 빛을 챙기며 떴어도 감고 있는 눈들 두꺼운 책들은 눈물이 적고 모든 기차는 레일 위만 달려서 오늘이 닮은 어제를 숨기는 태양 앞에서 기다리는 내일은 자물쇠인가 열쇠인가 저울은 무게 앞에서 빛나는 눈을 가져 용서는 울어도 소용없고 해 아래서는 같은 말도 다른 말 노을이 붉게 넘어간다 짐 들고 가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내일은 바다에 파도가 높을 것 같다

카테고리 없음 2023.01.11

우리시 23년 2월호

꽃 제단 꽃 먼저 내는 나무는 죽음의 편이다 꽃눈이 열릴 때부터 햇빛의 방향을 서쪽에 맞추고 가장 예쁜 색으로 접시마다 상을 차린다 제단에 오른 것들은 바람의 말을 잘 듣고 한도 없는 웃음을 가져 봄의 중앙으로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된다 쓰디쓴 울음은 어디에 감추는지 다가가면 제 몸으로 품어 그늘이 깊은 바닥 거기 어디쯤 꿈으로 돌아가는 잠의 예약이 싱싱하다 먹이 쪽으로 눈이 먼저 날아가는 벌처럼 제수를 뜨고 지나는 길 몇몇 후회와 만족이 함께 사는 한 철 늦은 끄트머리에 아직 떠나지 못한 꽃송이 목이 아프다 제물은 시작부터 환생을 꿈꾸었던가 꽃은 지고 싶어 활짝 핀다 거미의 시간// 거미 한 마리 주차장에 붙어 있다 낮이 멍석을 깔고 서서히 어둠의 조문이 우거지자 바람이 빈집으로 이사한다 지상의 끝은 어..

카테고리 없음 2022.12.13

나는 봄, 봄이니까요

당신과 헤어져야 해요 팔이 저려요, 몸이 분침을 따라 돌아요 텔레비전을 보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아요 다니던 길이 지워져요 갑자기 바람이 손을 잡아요 눈이 오네요 길이 미끄러워 누군가 넘어지는 소리 너무 아파서 울지 못해요 바람이 그길을 지나가야 한대요 갈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신발을 짝자기로 신고 앰뷸런스를 탔어요 내 옷은 하얀 시트로 덮여 있고 당신 가슴에 비가 내려요 닦아도 닦아도 닦아지지가 않아요 나는 꽃 핀 들판을 지나는데 자꾸만 울음소리가 들려요 울지 말아요 돌아보면 안 돼요 불을 켜요 밥도 먹고 잇몸 보이도록 웃어요 교회 갈 때는 밝은 색 외투 입고요 나를 위해 기도하지 말아요 나는 봄 봄이니까요 응급실에서 챙긴 내 머리카락도 태워버려요 봄엔 겨울이라는 단어가 없어요 내 입술에 당신의 마지막 ..

카테고리 없음 2022.12.13

인연

인연 강우현 경포대까지 와서 침묵하던 당신을 알 수 없었다 마지막 인사 붉어질 때 입꼬리 조금 떨렸지만 따라가겠다고 나서지 못했다 한 발 앞서 갔으니 순간이라 해도 서로 다른 길 사람들 소리 나목을 휘돌아가는 바람처럼 들렸다 더 이상 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엄마가 말했다 같이 바라본 하늘이 아직도 늙지 않은 여기 우리는 오래전 돌아간 기억을 지운 채 다시 슬픔을 시작했고 흙이 되어도 좋고 바람이 되어도 좋았다 같이 걷던 모래사장에 발자국 하나 탑으로 쌓았으니 천년만년 지나 기단 하나 올리러 온들 당신이 안았던 일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홀로 바라보는 노을은 시작부터 지워지던 한 생 마지막 문을 열고 가는 뒷모습이 붉다

카테고리 없음 2022.12.08

발자국 탑

경포대까지 와서 사라지는 노을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 인사 붉어질 때 따라가겠다고 못 했다 한 발 앞서 갔으니 순간이라 해도 서로 다른 길 마음에 새긴 시간과 땀나도록 놀아야지 다 두고 가도 섭섭지 않은 여기 같이 거닐었던 기억만으로 흙이 되어도 좋고 바람이 되어도 좋다 모래사장을 다 걸어간 뒤 탑 같은 발자국 새겨져 몇천 년쯤 지나 기단 하나 올리러 온다면 오늘도 발자국 하나 쌓는다

카테고리 없음 2022.11.28

시소

시소 강우현 유모가 아이들을 기다려요 추운 바람 상관없어요 할머니가 아기를 데리고 오면 모래를 털며 자리를 권하고 바닥에 타이어 옆구리를 들이받아 시동 걸어요 아기는 허공에서 할머니는 땅에서 신이 나요 지구도 아이처럼 빙글빙글 돌아요 살다 보면 어디 웃을 일만 있나요 본인만 아는 그림자가 볼을 타고 흐르면 남들이 볼 때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더 웃으면 성공 등나무가 여름내 기르던 정자가 또 눈을 비벼요 펑퍼짐한 엉덩이와 쳐지지 않은 가슴을 가진 그녀 눈물이 그렁해져 오는 아기를 기다릴 거예요 일하는 엄마들은 겨울도 걱정 없어요 유모 손 잡고 대나무처럼 클 테니까요 바람이 구름을 모으는 저녁이에요 ................................................. 이방만 안 잠기는데..

카테고리 없음 2022.11.24

원죄의 원칙

성범죄는 초범이나 십범이나 무게가 같아요 망치 소리가 정한대로 쭉 가는 거잖아요 발찌 차고 살금살금 이사해봤자 야옹 소리 들려요 경찰도 일반도 이반도 주시한다는 걸 몰랐나 봐요 우리 지부 일 등 할래요 불쌍한 사람 품고 가르쳐서 길러볼까요 당직 시간도 24시간으로 바뀌면 와우! 수당도 ++이잖아요 못 먹어도 고! 고! 고 해요 우리는 모두 죄인이잖아요 누구나 똑같이 적용되는 신의 법 원죄의 원칙을 적용하자고요 사람들이 떠나라고 난리 칠 때 가서 상담도 하고 허그도 해서 데려와 훈련 시켜 취직시키자고요 우리도 그들 때문에 먹고 사는데 두루두루 좋자고요

카테고리 없음 2022.11.04